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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키키 잊고 태평양의 절벽을 걷다

 와이키키. 비키니. 알로하(안녕).

 하와이에 대한 첫 연상 단어가 이 정도라면, 당신은 하와이를 안락한 휴양지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호놀룰루 공항에서 국내선 하와이안 에어라인을 잡아타고 30분. 카우아이(Kauai)에 도착했다. 

 1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뤄진 하와이에서 4번째로 큰 섬. 여기엔 편도 11마일(약 18㎞)의 '칼랄라우(Kalalau) 트레일'이 있다. 

 1박 2일 동안 왕복 22마일 트레킹을 마친 뒤 확신했다. 평생 한 번은 꼭 걸을 가치가 있는, 혹은 도전해 볼만한 코스라고. 바로 이곳이 조선일보 주말매거진의 새 시리즈 '세계의 트레킹' 2편이자, 올해 여름휴가 특집 제3편이다.

 칼랄라우 트레일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없다. 하지만 몇 가지 묘사가 가능하다. 

 첫째, 칼랄라우 트레일의 편도 18㎞는 8시간 동안 태평양을 오른쪽에 끼고 걷는 낭떠러지 길. 그래서 이 해안의 이름도 팔리(Pali·절벽)다.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1m 오른쪽에 에메랄드빛 바다가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당신이 해수면과 같은 높이에 있느냐, 천길 낭떠러지 위에서 굽어보느냐, 아니면 그 사이 어느 지점에 있느냐 정도. 이 길의 종착지인 카우아이 비치에 도착할 때까지, 바다는 늘 옆에 있었다. 

 잠시 계곡 안쪽 길로 들어가 바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도, 지칠 줄 모르는 대양의 파도는 당신의 뒷덜미를 잡아챈다.


 
▲ 길 오른쪽은 태평양, 왼쪽은 그랜드캐니언을 연상케 하는 협곡. 옛 하와이 전사들이 호연지기를 길렀던 절벽의 길을 따라 걷는다. 
두 번째, 그렇다면 왼쪽에는 누가 있을까. 문호 마크 트웨인이 '태평양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극찬했던 와이미아(Waimia) 캐니언이 묵묵히 그 8시간을 지켜본다. 그동안 트레커는 5개의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정확히는 연봉(連峰)의 정상을 정복하는 산행이 아니라, 바다와 면한 산의 허리를 조심조심 에두르는 길이다. 태평양의 격렬한 파도와 호탕한 폭포가 수백만년에 걸쳐 깎아낸 놀라운 계곡들. 정과 끌로 정상부터 바닥까지 산의 세로 홈을 날카롭게 팠을 때를 상상해본다면 아마 유사할 것이다. 위태로운 각도의 돋을새김과 오목새김이 8시간 동안 반복된다.

세 번째, 이 길은 하와이 전사(戰士)의 트레킹. 하와이에서 태어난 트레킹 가이드 앤드루(Andrew·40)는 "이 길을 걸으며 우리 섬의 옛 전사들은 호연지기(great spirit)를 길렀다"고 했다. 백사장에서 무예를, 길에서 튼튼한 다리를, 그리고 시간에서는 참을성을.

 물론 이 놀라운 경험을 아무에게나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경의(敬意)로 비유하자면, 해병대 정신이 필요하다. "누구나 칼랄라우를 걸을 수 있다면, 나는 결코 칼랄라우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스스로에 대한 세뇌. 결코 안락한 8시간은 아니다. 

 특히 6시간 넘어 오후의 태양이 수직으로 내리꽂을 때, 텐트와 침낭이 한없이 어깨를 찍어 누를 때, 해병대식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지는 말 것. 8시간 동안 북한산을 종주(縱走)할 수 있는 체력과 약간의 용기·집중력만 있다면, 누구라도 이 천혜의 트레킹을 체험할 수 있으니까.

 영화 '남태평양' '킹콩' '쥬라기 공원' '캐리비안의 해적'을 찍은 곳. 여기가 최고 풍광이라고 생각했는데, 모퉁이를 돌면 한층 더 격한 탄성을 유발케 하는 카우아이. 당신과 나는 지금 태평양, 절벽 위를 걸어가고 있다.


 06:00 케에 비치에서 출발 

 카우아이섬의 트레킹·카약장비 대여업체인 '카약카우아 이'(kayakkauai.com). 여기서 텐트와 침낭, 배낭 등을 빌려 출발한다. 20여년 전, 누구보다 먼저 이 섬에서 가게를 열었다는 60대의 사내 미코는 "부디 마지막 하와이여행이 아니기를 바란다"며 농담 반 진담 반. 1박2일에 칼랄라우 트레일을 왕복하겠다는 계획을 들은 뒤였다. 

 배낭을 지고 편도 18㎞를 걷고 나서, 다음 날 바로 돌아오는 건 미친 짓이라는 게 이 경험 많은 사내의 상식이다. 

 30분의 드라이브 이후, 미코는 우리를 출발지인 케에(Kee) 비치에 내려놨다. "내일 도착해서 전화하면 데리러 올게"라는 인사와 함께. 트레일 코스에서는 물론, 입구에서도 휴대전화는 터지지 않는다. 저 앞에 동그마니 놓인 유선 공중전화 한 대가 애처롭다.

 11:00 진흙길을 거쳐 하나코아 밸리까지 

 목표대로 절반을 걸었다. 9㎞ 지점은 하나코아(Hanakoa) 밸리. 여기에 오기까지 두 개의 난코스를 돌파했다. 

 처음 약 3㎞가량은 진흙의 길. 심한 곳은 거의 보령 머드축제도 할 수 있을 만큼의 점도다. 개흙이 등산화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 개흙을 겨우 돌파하고 나니 하나카피아이(Hanakapiai) 계곡과 해변. 물살 급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산에서 내려온 계곡수와 파도가 겹치는 지점이다. 정해진 길로만 다니면 큰 문제는 없는데, 늘 제멋대로이고 싶은 인간의 속성이 꼭 사단을 일으킨다. 표지판 하나가 눈에 뜨인다. "A slip can be a death."(한 발자국 미끄러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옆에는 예상 밖의 급류로 인해 현재까지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가 진행형으로 적혀 있다. 82명째. 등골 아래로 한 줄기 뜨뜻한 것이 흘러내린다.

 16:00 절벽 위를 걷는 마지막 9㎞ 구간 

 칼랄라우 트레일의 후반은 작열하는 태양이 지배한다. 지형적인 이유로 앞의 절반은 빗속에 걸었지만, 이후에는 바짝 마른 날씨. 태양을 피하기 위해 뒤로 돌려썼던 캡을 앞으로 돌리려다가, 흠칫 놀란다. 이미 챙이 앞으로 와 있다. 

 생수병 안의 물도 이미 바닥난 지 오래. 숨이 턱에 찬 이 트레킹을 위로하는 건 오직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풍광뿐이다. 저 아래, 코발트블루 바다 위에 오렌지빛 카약이 깎아놓은 손톱처럼 위태롭게 떠 있다. 

 걷는 걸 제외하면 칼랄라우 비치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카약뿐. 구태여 산길을 돌아오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절대 거리도 더 가깝다고 했다. 구태여 더 오래 걸리고 더 힘든 트레킹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주저앉으려는 순간, 마지막 관문인 칼랄라우 계곡이 나타났다. 

 수영복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우리는 풍덩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먼저 와 있던, 비키니를 입은 수퍼모델급 몸매의 블론드가 저 앞에서 손짓하듯 쳐다본다. 알로하(안녕).

기사 입력시간: 2010-07-27 0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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