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다국적 버스 여행은 말 그대로 세계 각지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다. 호주, 영국, 남아공, 일본 등 국적은 물론 회계사, 의대생, 과학수사요원 등 직업도 다양하다. 이들의 참가 이유는 각양각색.
예컨대 호주에서 온 테리(25)와 제이슨(25)은 '남자들의 여행(manscursion)'이란 그룹을 결성해 미국에 왔다. '몸에 해로운 음식만 먹는다' '잭·짐·조니(양주 이름)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조항을 티셔츠에 새겨 맞춰 입고 다닌다. 이들은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을 실천하는 중이라고. "다국적 여행만 세 번째"라는 세라(25)는 "지난번 뉴질랜드 여행에서 두 커플이 결혼하고 한 커플이 약혼했다"며 은근히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호주에서 온 마이클(21)은 여행 5일째 되는 날, 자진해서 마이크를 잡는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나는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에 불과했다"고 고백하며 '늑대'들의 사기를 북돋는다.
영어를 못한다면 오히려 좋은 기회다. 모르는 단어를 자꾸만 되물어도 한 박자 느린 내 회화에 귀를 기울여준다. 덕분에 여행이 끝날 때쯤엔 조금 늘어난 영어 실력에 자신감이 붙는다. 덤으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사람도 꽤 된다. "저는 엄마가 아니니 밤에는 전화하지 마라"는 여행매니저가 있는 만큼 철저히 개인적이되 혼자 여행하고 싶지 않은 여행자에게 적합하다.
다국적 버스여행으로 떠난 곳은 미국 서부. 6박7일간 로스앤젤레스·샌디에이고·그랜드 캐니언·라스베이거스를 돌았다. 영국·호주·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각지에서 온 40여명의 젊은 친구들과 함께한 특별한 여행.
◆샌디에이고(San Diego)
처음은 언제나 어색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해 샌디에이고를 향하는 버스 안 47명의 얼굴엔 긴장이 감돈다. 오로지 여행을 위해 만난 만 18~35세의 다국적 젊은이들이다.
약 3시간 후 도착한 곳은 해양도시 샌디에이고. 유서 깊은 샌디에이고의 명물에 대해 설명하는 매니저 켈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서로 눈치 보느라 듣는 사람이 별로 없다. 딴 짓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바다만 바라보며 일행을 애써 무시하는 은둔형. 프로필을 읊으며 친구를 만드는 노력파. 구석에서 함께 온 친구와 일행을 평가하는 분석파. 어쨌든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다.
스페인 사람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1769년부터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는 '캘리포니아의 발상지' 샌디에이고 '올드타운(Old Town)주립공원'에 들어섰다. 다들 입구에 서서 어디로 갈지 몰라 망설인다. 그러다가도 하나둘 기념품 가게에서 만난다. "이것 좀 봐봐, 신기해!" 네덜란드에서 온 티얼자(25)가 부른다. 사진을 찍자며 카메라를 건네는 동시에 우리는 일행이 됐다.
식사 후 다들 나이트클럽에 간다. 브라질에서 온 친구들은 테킬라를 연거푸 마시며 삼바춤을 강의한다. 브라질 친구 카리나(26)가 "호주 영어를 못 알아듣겠다"며 투덜거린다. 일행 중 절반가량인 23명이 호주에서 왔다. 실제 호주식 영어는 알아듣기 까다롭다. 친해지기의 관건은 역시 공통점 만들기. 든든한 내 편이 생긴 기분이다.
◆피닉스(Phoenix)
버스는 애리조나(Arizona)주로 향한다. 사람 키보다 큰 선인장이 뜨거운 사막 곳곳에 마구 뿌려져 있다. 10시간 정도 걸리는 버스 여행의 관건은 자리 잡기. 수학여행의 오랜 전통처럼 맨 뒷좌석은 놀기 좋아하는 언니 오빠 차지다. 여행 3일째에 들어서니 일행 간에 편차가 생긴다. 뒷좌석을 차지한 커플들은 첫눈에 반했는지 벌써 붙어 다닌다. 여전히 모르는 얼굴도 많은데 말이다. 밤새 친해진 사람들은 자연스레 옆자리를 내주고 수다를 떤다.
◆세도나(Sedona)
인구 1만5000명의 작은 도시 세도나는 '기 센 도시'로 소문 난 곳. 실제 인구 3분의 1이 외국에서 온 명상가들이다. 알파치노·마돈나 등 유명 배우들도 이곳의 '기'를 느끼며 휴식하려 별장을 사 놨다.
"거친 삶을 즐기고픈 '여성'만 내 지프에 타." 이곳 베테랑 지프 운전사 로키(51)도 기가 세긴 마찬가지. 한 차에 7명씩 올라탔다.
병풍처럼 붉은 바위가 도시를 감싼 붉은 바위의 도시 세도나. 이곳에서 꼭 해봐야 하는 게 지프 투어다. 놀이기구 타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
"어디 출신?" "스위스 루첸인데요." "맙소사, 내 헤어진 전부인(前婦人) 고향이잖아." 로키는 괜한 구실을 대며 남자 승객을 못마땅해 한다.
에너지가 강해 옛날 인디언들이 제사를 지냈다는 종바위, 굴뚝바위, 도마뱀바위를 지나 붉은 숲 한가운데로 향한다. 거친 드라이브의 연속이다. 붉은 먼지가 온몸을 뒤덮는다.
세도나의 지프 투어 회사는 9개. 그러나 '레드 락 지프 투어'의 운전사 로키는 "이런 터프한 카우보이가 모는 차는 다른 데서 못 타"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
그랜드 캐니언에서 꼭 해야 하는 건 헬리콥터 투어와 하이킹 두 가지다. 오전 7시. 헬리콥터를 타고 그랜드 캐니언 안쪽으로 들어간다. 층층이 쌓인 붉은 바위, 굽이치는 콜로라도강, 하얀 눈과 전나무 숲이 장관이다. 서쪽 끝 허미츠 레스트(Hermits Rest)에서 시작해 10㎞쯤 끝없이 걷다 보니 숙소 매즈윅 로지(Maswik Lodge)에 도착했다.
매니저 켈리는 "고립은 동반자를 만든다"고 했다. 그랜드 캐니언엔 사실상 거대한 협곡뿐이다. 게다가 숙소 로비에서 제일 먼저 자리를 차지한 한 사람만 무선인터넷을 할 수 있는 단절된 구조다. 자유시간이면 모두 로비에 모여 수다의 장을 편다. 알고 보니 이 친구들은 회계사, 의대생, 과학수사요원처럼 각국의 엘리트급 청년 인재들이다. 잠시 직업인으로서의 계급장을 다 뗀 것뿐. 브라질에서 온 과학수사요원 카리나(26)는 "경찰차를 타고 범죄 현장에 가도 자그마한 체구 때문에 '보안관 딸이 위험한 곳에 놀러왔다'며 내쫓긴 적도 있다"고 농담 섞인 푸념을 늘어놓는다. 일본에서 온 의대생 유키(23)는 "무슨 비비 크림을 쓰냐", "SKY 대학이 도대체 뭐냐"고 물으며 한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라스베이거스(Las Vegas)
원래대로라면 라스베이거스 중심대로 스트립(Strip)을 관광해야 했다. 그러나 저녁식사 동안 술을 마셔댄 만취 승객들 탓에 매니저 켈리는 진동하는 냄새를 참지 못하고 "토할 것 같다"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10분 후 켈리가 화장실을 빌려 썼다는 '그레이스랜드 웨딩 채플(Graceland Wedding Chapel)'에 모여 앉았다. '5분이면 결혼하고 이혼한다'는 라스베이거스. 아기자기한 소규모 예배당에서는 일행을 위해 모의 결혼식을 해줬다.로큰롤 음악과 함께 뚱뚱한 엘비스 프레슬리가 나타났다. 트위스트 댄스를 한바탕 추더니 오늘의 신랑 신부를 발표한다. "제레미군, 킴벌리양 어디 있습니까?" 두 사람은 얼굴이 빨개졌다. 순식간에 가상 결혼식이 이루어졌다. 술에 취한 하객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아쉽지만 이제는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다음 날 아침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시사회가 열린다. 호주에서 온 대니얼이 그랜드 캐니언에서 찍은 영상을 편집해 영화로 만들었다. 모두 꿈만 같았던 지난 일주일을 떠올리며 조용히 화면을 바라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긴 어려울 것 같다. 이름과 메일 주소, 연락처가 적힌 종이가 돌기 시작한다. 다음번 여행을 기약한다.